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문단 편집) ==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향한 경쟁 == [[테오도로스 콤니노스 두카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된 처음 5년간은 [[니케아 제국]]에 희망을 걸었다. 실제로 그는 님페온에서 [[테오도로스 1세]]에게 충성 맹세를 하고 라틴 제국과의 싸움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1214년부터의 니케아 황제의 행보는 테오도로스에게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라틴 제국]]의 황제 앙리와 그가 정통으로 생각했던 황제 [[테오도로스 1세]]가 님페온에서 평화조약을 맺고, 오히려 제국 부흥의 기치를 건 또 다른 부흥세력인 [[트라페준타 제국]]과의 싸움만에 열중한 것은 그에게 있어서 배신행위나 다름없어 보였다.[* 물론 니케아 황제였던 테오도로스 1세 입장에서도 할 말이 있는 게, 룸 술탄국의 경우, 안티오키아 전투에서 니케아가 패하기 직전에 테오도로스가 술탄과의 [[일기토]]에서 이겨 겨우 승리를 거둔 마당에 역으로 룸 술탄국으로 쳐들어가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고, 라틴 제국의 앙리는 룸 술탄국과의 전투 직후 병력 부족에 시달리던 테오도로스가 겨우 긁어모은 군대를 간단하게 격파하고, 님페온까지 진격해오면서 니케아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는 등 죽는 그 순간까지 니케아가 한 번도 제대로 이겨본 적이 없는 강한 적이었다. 결국 남은 진출 방향은 트라페준타가 차지한 파플라고니아 밖에 없었던 것. 거기에 트라페준타의 메가스 콤니노스 왕조는 니케아의 라스카리스 왕조를 정통으로 보지 않고 라틴 제국, 룸 술탄국과 손을 잡고 니케아를 멸망시키려 들었기에 한 번은 밟아야했던 적이었다.] 그에게는 제국 부흥이라는 야망이 있었고, 이복형의 암살로 인해 1214년에 이피로스의 주인이 되자, 곧 그 야망을 실현시킬 힘 또한 가지게 되었다. 그는 니케아 제국에서 이피로스로 건너가 독립을 천명했다. 그는 동진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먼저 그는 형 대에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에 복속된 알바니아의 토후들과 관계를 개선해 북방을 안정시켰다. 또한 북방에서 새로이 떠오르는 세르비아 대공국과의 적대관계를 멈추고 동맹을 선언했다. 그러기 위해 테오도로스는 자신의 동생 마누일 콤니노스 두카스를 세르비아 대공국의 [[스테판 네마니치]]의 여동생과 결혼시키고, 형이 진행하고 있었던 세르비아 령 [[제타]]에 대한 공격 또한 멈추는 화해의 제스처를 보냈다. 스테판 네마니치도 계속해서 강성해지는 [[불가리아 제국]]을 억제할 동맹이 필요했으므로, 그의 아들 [[스테판 라도슬라프]]를 미하일의 외조카, 안나와 결혼시키려 하는 등, 서로에 대한 우의를 다졌다.[* 세르비아와 이피로스 로마인들의 사이에는 족보가 복잡해졌다. 처음에 라도슬라프와 혼담이 오갔던 사람은 미하일의 여동생 테오도라였는데, 테오도라는 스테판 네마냐의 전처였던 에우도키아 앙겔리나의 사촌이었으므로 이 둘의 결혼은 촌수가 너무 가까운 근친혼이라 하여 [[정교회]] 대주교들이 반대했다. 결국 라도슬라프가 테오도라의 딸 안나와 결혼하는 것으로 촌수 문제는 마무리되었다.] 그는 북방이 정리되자 마케도니아로 손을 뻗었다. [[불가리아 제국]] 차르 [[보릴(불가리아 제2제국)|보릴]]은 마케도니아의 그리스 귀족들이 테오도로스를 반기며 성문을 여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오흐리드]]와 펠라고니아 대부분을 차지한 테오도로스는 북부 그리스의 패권을 손에 쥐었고, 대교구가 있는 [[오흐리드]]를 차지했으므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좌를 들고 있는 [[니케아 제국]]보다는 못해도 [[정교회]] 권에서 어느 정도의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내정의 기반이 다져지자 테오도로스가 눈을 돌린 곳은 테살로니카 왕국이었다. 니케아와 불가리아를 상대하느라 피폐해지고 라틴 제국 황제가 바뀌는 틈을 타서 테오도로스가 친정에 나선 이피로스군은 단숨에 테살로니카를 무너트리고 땅을 회복했다. 이로써 테살로니키, 마케도니아, 이피로스를 확보한 이피로스는 1217년 라틴 제국의 새 황제 [[피에르(라틴 제국)|피에르]]가 알바니아로 공격해오는 것을 격파하고 피에르를 사로잡아 옥사시키는 개가를 올렸다. 테살로니키에서 황제를 칭한 테오도로스는 1225년에는 트라키아를 점령한 니케아 제국을 몰아내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관문인 [[아드리아노폴리스]]를 차지하며 콘스탄티노폴리스 점령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제국이 십자군에게 멸망 이후 각지에 세워진 망명 정권들 중 제국 재건이라는 목표에 가장 가까이 간 사람은 테오도로스였으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하기에 앞서 먼저 현재 자신에게 가장 위협적인 세력인 불가리아를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한 테오도로스는 1230년 서방에서 용병을 끌어들여 8만 대군을 모아 불가리아를 기습해 들어갔다. 이 정도 규모면 낙승이라 생각했는지 처자식들까지 거느리고 도중의 마을들을 약탈하며 천천히 전진하던 그는 클로코트니차라는 작은 마을에서 뜻밖의 기습공격을 당했다.([[클로코트니차 전투]]) 이피로스의 침략 소식을 들은 불가리아 황제 [[이반 아센 2세]]가 불과 수천 명의 기병만을 이끌고 이피로스 군이 진군한 거리의 3배나 되는 거리를 단숨에 달려와 기습해온 것이다. 이때 이반 아센 2세는 창끝에 이피로스의 배신으로 휴지조각이 되어버린 상호방위조약서를 달고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불의의 기습과 교묘한 포위 전술에 말려든 이피로스군은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테오도로스는 포로가 되었고, 그의 동생 마누일만이 소수의 호위군을 대동하고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마누일은 이반 아센의 사위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